창원시 진해구 경화동 골목 안쪽의 주택 1층. 알록달록한 스티커가 붙은 큰 창 너머로 아기자기한 일본 캐릭터 문구와 스낵, 재치 있는 소품들이 가득 진열돼 있는 것이 보인다. 노래방에서나 볼 법한 미러볼이 돌며 신비로운 분위기를 내고 있는 이곳은 전통주 전문상점인 ‘개미소굴’이다. 겉으로 보면 문구점에 가깝지만 가장 안쪽에 위치하고 있는 업소용 냉장고 두 대에는 우리나라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전통주 40여종으로 가득 채워져있다. 5060세대들이 주로 찾는 식당이나 낡은 관광지, 혹은 시골 노점서 댓병으로 저렴하게 판매하는 전통주의 느낌은 찾아볼 수 없다. 냉장고 옆 실온보관 중인 와인들처럼 생산지와 도수, 양조장을 따지며 하나하나 신중하게 고르고, 일부는 시음해 볼 수 있도록 꾸며져있다. 고리타분하다고 여겨졌던 전통주가 2030세대에게 인기를 얻으면서 전통주를 즐길 수 있는 공간들이 하나 둘 생겨나고 있는 것이다. 전통주는 어떻게 2030을 취하게 만들었을까.
◇2030, 전통주에 취하다
올해 8월 문을 연 ‘개미소굴’ 이재희(36) 대표는 스스로가 30대다. 전통주에 대한 시각이 달라지고 있다는 변화를 일찌감치 포착한 친동생이 4개월 먼저 서울에서 전통주 전문상점을 열고, 반응이 좋은 것을 지켜본 후 뒤이어 준비해 개점한 것이다. 무엇보다 직접 마셔본 전통주는 맛이 좋았고 같은 재료로 지역과 양조장마다 다른 맛과 특징을 가진다는 점도 재밌다고 생각했다.
그는 “경남에서 이렇게 전통주를 한데 모아 놓고 파는 곳이 드물다 보니 다양한 연령대가 찾아주시지만 특히 젊은 분들, 커플들이 많이 오며 인기 많은 전통주들은 입고된 주말에 다 팔리기도 한다”며 “전통주마다 원산지와 도수, 특징 등을 적어놓았는데 그걸 보고 고르는 재미를 좋아하시는 것 같다”고 말했다.
양조장 종사자들도 젊은 층이 늘고 있는데 이들은 독특하거나 특별한 것에는 아낌없이 투자하는 2030세대를 사로잡기 위해 술의 정체성이 드러나는 병을 제작하거나 크리스마스 등 시즌 때는 병에 붙는 라벨 디자인을 바꾸기도 한다. 주류에 대한 관심이 확대됨에 따라 여행 중 양조장을 직접 찾아 그 지역만의 전통주를 맛보는 사람들도 늘고 있는 추세다.
밀양시 단장면에 있는 양조장 ‘클래식술도가’를 운영하는 박종대(62) 대표는 “주변에 캠핑장들도 많이 있다 보니까 젊은 분들이 캠핑하러 가다가 직접 양조장을 들려 양조장을 구경한 뒤 술을 사가는 분들도 늘고 있다”며 “양조장에 딸린 카페에서 시음을 해볼 수 있으니 맛보는 재미도 있어 만족스러워하시는 것 같다”고 밝혔다.
◇전통주의 인기 비결
“해외여행도 못 나가는데 가족들이나 친구들이랑 모일 때 좀 더 특별한 술을 마시고 싶은 마음이 커요, 아무 데서나 구할 수 없는 좋은 술, 사진에도 예쁘게 담기는 술이요(30·창원시 마산합포구 신포동)”
AT한국농수산식품유통공사에서 올해 발간한 2020 전통주 주류시장 트렌드 보고서에 따르면 코로나19 확산에 따라 혼자서 마시는 ‘혼술’과 집에서 마시는 ‘홈술’로의 주류 트렌드가 변화해감에 따라 젊은 층들의 온라인 주류구매가 증가했다. 특히 희소한 가치와 경험을 중시하는 이들은 주류 문화에서 수제맥주, 와인의 다양성을 경험해본 바 있어 전통주에 대해서도 다양성을 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복순도가, 이화백주 등 일부 양조장이 이를 파악, 고급스런 프리미엄 탄산막걸리로 소비자들의 기대를 충족시켜 나가며 전통주 트렌드를 만들어냈다.
창원막걸리를 생산하고 있는 맑은내일 박중협 대표는 “그동안 대기업 중심의 획일적인 주류 문화가 강세였지만, 최근에는 와인, 일본 사케, 수제맥주, 증류식소주, 약주 및 고급막걸리 등을 접해보고자 하는 마음에 다양성이 커져가고, 전통주의 인터넷 판매가 가능해지며 새로운 전통주를 찾고 소비하고자 하는 경향이 뚜렷이 나타나고 있는 상황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경남 전통주들도 변신 중
18일 오전 창원컨벤션센터에서 열린 경남특산물박람회장 한쪽에는 경남전통주진흥협회의 ‘경남 전통주 BAR’가 섰다. 평소 마트에서 쉽게 보기 힘든 도내 14곳 양조장의 25여가지 술들이 한자리에서 선보이자 많은 시민들이 부스를 찾아 막걸리와 약주 등을 구매했다. 한쪽에서는 도내 양조장 대표들이 단성양조장이 새로 준비하고 있는 프리미엄 막걸리에 대해 논의하고 있었다.
경남전통주진흥협회 원태연 회장은 “기존에는 전통한옥 같은 느낌으로 부스를 꾸미고 한복도 입었지만 젊은 감성에 좀 더 맞추고자 처음으로 배경을 바(BAR)와 같이 조성했다”며 “다들 이 기회를 살리기 위해 갖가지 개발을 많이 시도해 새로운 제품을 많이 선보이고 있는 추세로 경남 전통주의 발전을 일으킬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밀양시 단장면에 있는 양조장 ‘클래식술도가(구 단장양조장)’는 올해 8월 기존 막걸리병과 다른 모양의 병, 젊은 감성의 서체가 들어간 새로운 라벨을 붙인 ‘밀양탁주’, ‘밀양 대추 막걸리’를 출시했다.
클래식술도가 박종대(62) 대표는 “젊은이들이 찾는 전통주 바틀숍(주류 전문판매점)이나 이자까야 등지에서 입고 문의가 오는 등 반응이 좋은 편이다”며 “거리두기가 완화되면 젊은 층이 좋아할만한 전통주 관련 체험프로그램과 농림축산식품부에서 선정하는 ‘찾아가는 양조장’ 사업 도전을 위해 준비 중이다”고 말했다.
창원막걸리로 유명한 맑은내일에서도 지난 여름 한국형 화이트 와인을 표방하며 로열블루색 와인병에 담긴 ‘운암1945’를 비롯해 ‘맑은내일 스파클링 막걸리’, ‘조선주조사’ 등 다양한 전통주를 새롭게 출시했다.
맑은내일 박중협 대표는 “전통주는 고리타분한 이들만 마시는 술로 취급받아 왔으며, 복합적인 요인으로 일본사케는 비싸게 마셔도 한국 약주와 청주는 비싸면 안 된다는 인식이 자리했던 것 같다”며 “전통주에 대한 새로운 문화가 열리고, 한류 붐이 일고 있는 만큼 전통주가 제대로 평가받길 바란다. 저희도 준비를 더 철저히 해서 전통주가 새롭게 성장하는 기회를 직접 만드는 기업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
이슬기 기자 good@knnews.co.kr